소설

건반 위의 작은 별

#시기 2020. 1. 19. 23:35

 

 

불이 꺼진 무대의 공기는 차갑게 식어갔다. 너는 아직 홀로 남아, 이 어여쁜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데...

왜일까? 가까이서 보고 있어도 네가 멀리 있는 것만 같아 무서웠다.

연주가 끝나고 나는 박수를 쳤다.

"정말 좋았어. 실력이 많이 늘었는 걸?"

너는 대답 대신에 다시 피아노를 잡고, 그 해 여름처럼 뜨거운 열정을 쏟아부었다.

 

아쉽게도 난

그 연주를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저 별들 속에서도 빛날 수 있을까...?"

꿈에서 깬 나는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창 밖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여름이 왔구나 하고 무거워진 마음을 움켜쥐었다. 나는 대충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시피 학교에 갔다. 반 아이들의 소리는 매미보다도 시끄러웠다. 여기저기서 말을 거는 친구들에게 적당히 맞장구 쳐주며 수업 준비를 했다. 수업 시간이 되고 나는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 했다. 오늘 꿨던 꿈이 자꾸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너는 어떤 연주를 하고 싶었던 걸까? 무대 위에서 소프트 라이트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너를 생각했다. 아마도 이 그림은 네가 가장 원했던 그림이었을 텐데... 피아노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커 보였던 네가 작아 보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반짝거리던 그 빛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것쯤은 옆에서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학교에 오면 꼭 들러서 연습하고 갔던 음악실도 멀리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네가 걱정이 되어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봤지만 너는 좀처럼 내게 말을 해주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못 터놓는 것도 있는 건가 하는 서운함도 아예 없었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것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건 네가 얼마나 큰 아픔을 겪고 있을지 가늠할 수 없어 더 걱정이 되었다. 

귀뚜라미가 한창 연주하던 때의 밤을 기억하고 있다. 늦은 시간에 네게 집을 나왔다는 전화 한 통에 나는 황급히 집에서 나와 네가 있는 근처 공원으로 달려갔다. 너는 나를 보자마자 내 품에 달려들어 안겨 울기 바빴다. 다짜고짜 일어난 일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젖을 못 뗀 아기처럼 울고 있는 너를 그저 말없이 안아주는 것뿐이었다. 너는 어느샌가 울음을 뚝 그치고 공허한 시선으로 밤하늘을 바라봤다. 너의 그 눈에는 무척이나 많은 뜻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나도 너를 따라서 밤하늘을 봤다.

"피아노... 이제 그만 관둘까 싶다."

메마른 소리가 침묵을 가르고 공기 중에 울려 퍼졌다. 나는 시선을 다시 너로 옮겼고, 너의 다음 할 말을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피아노 같은 그런 하찮은 짓거리는 때려치우라더라. 음악이 날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서 인정받고 싶었는데 나는 그러질 못 했어."

"하지만 나 만큼은 널 인정하고 있어."

"너뿐이야. 고맙지만 문제는 너뿐이라는 거지."

그때 너의 말은 분명 조금 격앙되어있었다. 내가 널 인정해준다는 사실이 정말 고맙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나 밖에 없다는 게 부끄러웠던 건지 몰라도 나는 화내지 않고 가만히 너의 얘기를 들었다.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실력에 대한 원망, 무참히 짓밟히는 꿈, 건반 앞에서 작아져만 가는 기분 등 네가 느낀 여러 불안과 공포를 내게 토해냈다. 정말 슬픈 건 나는 여기서 너에게 어떠한 조언도, 위로도 해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날개가 꺾여버린 네게 날아갈 수 있다고 하는 건 고문과 다름없었다. 억지로 위로의 말을 생각하는 건 하지 않았다. 너도 그건 원하지 않을 테니까. 너는 미련이 가득 담긴 듯한 눈으로 밤하늘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나는 저 별들 속에서도 빛날 수 있을까...?"

 

이것이 너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였다.

 

아파트의 옥상은 잔인하리만치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어떻게 철문 하나 잠겨있지 않았던 걸까? 마치 옥상이 아니라 생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어떤 곳인 것처럼. 어차피 뛰어내릴 거 신발은 왜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메시지였던 것일 수도 있겠다. 너의 장례식장에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마주하느라 꽤나 힘들었다. 평소 말 한마디 걸어주지 않던 애들이 너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이 참 꼴불견이었다. 걔들은 어떻게 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먼저 간 너를 두고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너의 부모님한테도 분노의 감정이 솟았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댁의 사랑하는 자식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조금이라도 알아주셨나요?라고 당장이라도 따져 묻고 싶었지만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조문객들이 빠진 후에도 나는 너의 빈소를 지켰다. 너의 부모님으로부터 내게 고맙다고, 하늘에 있는 네가 나를 친구로 둬서 기쁘게 생각할 거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네게 있어서 나는 정말 너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을까? 문득 확인받고 싶어 졌다.

꿈에서 들었던 너의 연주는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가버려 알 길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건 바로 너인데 말이다. 연주가 어떻든 간에 그때 피아노를 치던 너의 모습은 가장 빛났고, 가장 뜨거웠다고 확신할 수 있다. 분명히 그건 아름다운 연주였을 테지. 그 꿈은 네가 나를 관객으로 초대한 특별 무대였다. 이따금씩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장 반짝이고 있을 너를 찾는다. 건반 위의 작은 별이 되어 세상에서 가장 눈 부신 연주를 어딘가에서 들려주고 있을 너를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