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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그러모은 곳...
소설

Bus Stop

by #시기 2020. 2. 23.

 주변의 풍경도 나도 세월의 역풍을 고스란히 맞아 눈에 띄게 바뀌었는데 어째서 이 버스 정류장은 그대로일까.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녹슨 정류장과 그 옆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허리 굽은 표지대는 수많은 역경이 지나간 흔적을 전사의 훈장 마냥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를 잃은 딱딱한 나무 벤치에 앉아본다. 삐걱 거리는 소리가 이젠 사람 한 명도 받아내기가 힘들다는 일종의 신호처럼 들렸다. 문득 이 오래된 정류장을 거치는 버스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어 무작정 기다려 보기로 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한 대의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직도 이 곳을 찾아주는 버스가 있다는 사실이 신선하면서 놀라웠다. 나는 딱히 정해 둔 행선지가 없었지만 버스에 탑승했다. 시간대에 비해 사람이 없어 한적한 버스 안은 저녁노을의 색으로 가득 물들어져 있었다. 나는 바깥이 잘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점점 작아져가는 낡은 버스 정류장을 뒤돌아 봤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는 버스가 있구나.' 그것은 버스 정류장을 향한 나의 연약한 부러움이자 고독함이었다.

 꽤나 익숙한 장소들이 물 흘러가듯이 지나갔다. 어릴 적 다녔던 초등학교, 친구들과 자주 같이 놀았던 공원 등 그 때의 따뜻했던 추억이 가슴을 촉촉이 적셨다. 그렇게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파편 아래에 이젠 삶의 잔인함에 지친 20대 청년만이 남아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다. 가방 속에 잠들어 있는 매정하고 차가운 대학 과제와 포트폴리오 자료가 아닌, 잃어버린 청춘이 그리웠고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았던 순수함이 그리웠다. 언제부턴가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 할수록 하나씩 잃으며 살고 있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함이지만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걸 두고 와버렸다. 그 낡은 버스 정류장을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잊혔어도 단 한 명의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찾아 봐준다면 그건 분명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버스가 정차하고 한 명의 사람이 탑승했다. 나와는 달리 이 버스는 앞으로 먼 길을 향해 나아갈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을 태우겠지. 다시 버스가 출발했다. 숨 가쁘게 살아온 내 인생에서 잠시 동안 정차할 곳은 어디일까? 하염없이 바라본 저녁노을에 비친 강의 풍경이 무척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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