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그러모은 곳...
소설

십삼월

by #시기 2019. 11. 10.

사계절의 끝에서 너와 끝이 났다. 봄 처럼 따뜻하게 시작한 우리는 결국 한겨울의 추위를 이기지 못 했다. 언제부턴가 벌어진 우리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건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었던 문제이리라. 우리는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슬프게도 그만큼 많이 맞지가 않았다. 너를 미워하고 또 미워하면서도 놓을 수 없는 이런 애매모호함에 절여진 채 몇 번의 밤을 보냈을까... 하룻밤도 넘기기 힘든데 말이다.
 내가 힘든만큼 너도 똑같이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 보다도 더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 결국 너는 짧은 거 같지만 길었던 우리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기 원했고 나는 그 점 하나를 받아들였다. 덤덤하게 이별을 고하는 너의 앞에서 우리는 이미 처음부터 이렇게 될 사이라는 것이 정해진 거 마냥 나도 덤덤하게 굴었지만, 사실은 마음 한 구석에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뭔가가 썩어 비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될 사이였다. 애초에 끝이 정해진 사이였다고 생각하니 이 보다 더 한 비극이 어디있을까 싶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하고 후회 해 봤자 내 마음은 벌써 너한테 모두 쏟아부은 후였다.
 옆구리가 시리고 마음도 텅 비어버린, 그냥 빈 깡통과도 다름 없는 12월이 지나가고 1월 새해가 찾아왔다. 해는 새롭게 바꼈는데 나는 12월이랑 다를 게 없었다. 걸핏하면 울고, 빛바랜 너를 추억하는 게 나의 전부였다. 매일 술을 마시며 혼자 지나간 세월을 그리고 있었다. 돌아보면 안 되는 거 알면서도 나는 거기에 중독이라도 되버린 거 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너를 잡았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하고 항상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묵묵부답이었다. 오늘도 술에 취해 추운 밤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패딩을 입고 있어도 가슴이 시린 건 막아줄 수 없는 모양이다. 요즘따라 술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던 내게 있어서 이건 엄청난 변화임에 틀림없다. 나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외로이 이별과 싸우고 있다. 매일 술에 의존하는 삶은 인생에도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내 손은 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참 구제불능인가 보구나... 무거운 한숨과 함께 하얀 입김이 피어 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어도 시려운 건 매 한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추울 때면 내 손을 너의 주머니 속에 넣어주곤 했는데... 갑자기 재생 되버린 아련한 기억에 나는 픽 하고 코웃음 쳤다. 너무 늦은 시간이다. 어서 빨리 집에 가야지 하고 길을 가던 그때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너였다. 취기가 오른 탓에 시야가 뿌옇게 보였지만 너의 얼굴 하나만큼은 똑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몽둥이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너는 다른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내가 취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 초점이 맞지 않는 눈빛, 전봇대 처럼 꼿꼿이 서 있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초라해보였다. 네가 행복해 하고 있다는 걸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너의 그 웃는 얼굴은 예전의 나와 있을 때 보다도 더 환하게 보이는 건 단순히 기분 탓인 걸까? 가슴이 쿡 쿡 쑤시고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하나가 끊어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묘하고 씁쓸한 기분의 파도가 내 안에서 거세게 쳤다.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는 기분이다. 온갖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너와 헤어진 후 아직까지 괴로움에 몸부림 치며 살아가고 있는데 너는 벌써 새 남자를 만나 구원 받은 삶을 살고 있구나...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길을 돌렸다. 그래.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너인데 예전보다 더 행복하길 바래야지.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너의 세계엔 새해가 밝았겠지만 아직 나에겐 끝 없이 이어지는 십삼월일 뿐이었다.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 세는 밤  (4) 2019.12.04
그녀의 구두  (0) 2019.12.02
글씨  (0) 2019.11.14
빨래  (0) 2019.11.12
꽃이 피는 하늘 아래서  (0) 2019.11.10

댓글